돈이 사람보다 더 중하진 않지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7년 동안 해온 축구선수생활을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그만두게 된 날. 그 날이 내 기억 속에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동했다. 5학년 때는 교내 대표 선수로 뽑혀 전국체전에 참가해 입상하기도 했다. 육상 꿈나무로서 탄탄대로의 길을 걷던 나에게 뜻밖의 커리어 체인지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를 방문한 정용환 감독님(86년, 90년 월드컵 국가대표선수)의 눈에 띄어 유소년 축구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 당시 운동장을 누비는 나의 모습을 본 감독님의 한줄평 "공을 달고 뛰는 미친 개 한 마리." 그 때가 국민학교 5학년 2학기 때였다.
훈련의 강도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높아졌다. 심장이 멎을 듯한 기분을 느끼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대표라는 미래의 꿈을 위해 견디고 또 견디었다. 하루는 훈련을 끝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축구화를 벗었는데 오른쪽 발의 3군데 발톱이 빠질 듯 말 듯한 채로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 날에 또 훈련을 뛰어야만 했기에 그 상태로 발톱을 놔둘 수 없어 이를 악물고 펜치로 3개를 다 뽑아 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잠시 뒤 기절했다. 깨어나보니 병원이었다. 과다 출혈로 혼수상태에 빠져 엠뷸런스에 실려왔던 것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대체 국가대표가 뭐길래 하나님과 일찍 독대 할려고 했는지. 그때는 온몸을 불 사르고 산화된다는 각오로 선수생활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대학팀으로 들어갈지 실업팀으로 들어갈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나는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그 당시 다수의 대학에서 스카웃 제안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은 고된 시간을 견딘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과 같았다. 입시테스트에는 신체검사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테스트를 앞둔 선수들은 부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당시 전국대회에 참가 중이었던 나도 몸을 사리며 시합에 임했다. 하지만 축구라는 게 나만 잘해서는 부상을 피할 수 없는 스포츠이기에, 운명의 장난처럼 상대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나의 무릎은 아작이 났다. 신체검사가 불과 2주 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모이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는 나에게 시련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 Research Internship on Image Recognition and Object Detection, 2011 ~ 2012
- Research Internship on the Impact of Obama Care on the Economy, 2013
- Academic Achievement (Spring & Fall 2009)
- Member of Phi Theta Kappa
- Member of Computer Club
한국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이스라엘 기업들, 반대로 이스라엘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주요 업무는 시장조사와 잠재파트너사발굴입니다.
시장조사 보고서 목록
- 2016. "Water Management and Modern Irrigation Technologies"
- 2016. "Elevator and Escalator Industry in Israel"
- 2017. "Stainless Steel Mixers & Agitators in Korean Market"
- 2017. "Virtual Reality: Markets and Future"
사업발주 목록
- 한국-이스라엘 양국간 스타트업 기술 교류
발주기관: 중소기업진흥공단
- Support for Israeli Exporters to Do Business in Korea
발주기관: Israel Export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Institute (IEIC)
연결된 Behance 계정이 없습니다.
연결된 Dribbble 계정이 없습니다.
연결된 GitHub 계정이 없습니다.
연결된 Bitbucket 계정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