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8살이던 시절에는 부모님이 사주신 닌텐도 고전 게임기를 즐겼고(89년도) 마리오, 동키콩 등의 초기 버젼의 게임들을 밤 늦게까지 했다. 당시 교육 분위기가 그랬는지 부모님이 개방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게임기를 사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부모님은 게임기(패밀리)와 수백가지 게임이 들어있는 게임팩을 선물해주셨고 아마도 맞벌이로 저녁 늦게 귀가하셔서 그런지 나는 하고 싶은 만큼 게임을 했었다. 외동이라 형제 자매와 싸울 일도 없었고.
당시에는 울트라맨 피규어나 후레시맨 합체로봇, 부메랑이라는 만화에서 나온 건전지 자동차, 레고가 유행했고 부모님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잘 사주셨다. 게임을 하거나 조립식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의성어를 내면서 놀기도 했다. 조립하는 것을 좋아해서 레고나 건담 피규어나 미니 자동차, 과자 상자에 들어있는 조악한 조립식 장난감을 열심히 조립해서 혼자 전쟁놀이를 했던 건데 어머니는 혼자 노는게 짠했다고 하신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연탄 보일러를 떼는 대방동 골목길 주택에 살았다. 겨울이면 아침마다 아버지가 보일러 연탄을 바꿔놓고 출근하셨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 나는 하교해서 어머니 학원에 가서 피아노를 배우거나 동네 쌀집, 통닭집, 미용실에 가서 놀거나, 친구네 집에서 페르시아의 왕자 같은 게임을 하거나 했다. 줄로 감아서 던져서 돌리는 팽이와 딱지를 가지고 놀거나 구슬 치기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서초동으로 이사왔는데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따라왔지만 나름 좋은 학군을 따라 적당한 시기에 전학을 온 것이었고 어머니는 자식의 학군을 위해 한 동안 꽤 먼 길을 출퇴근 하시다가 학원을 정리하셨다. 그 무렵 집에 컴퓨터가 놓였다. 486 컴퓨터였을 것 같은데 워크래프트를 했던 기억이 난다. 서이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혼자 축구공이나 장난감 석궁, 부메랑 같은 것을 가지고 가서 아이들이 있으면 같이 공을 차고 없으면 혼자 벽에 공을 차면서 놀다가 석양을 보면서 귀가하곤 했다. 평발이라서 오래 뛰면 발이 아팠는데 아파서 못 걸을 때까지 뛰어다녔다.
슈퍼패미컴이라는 게임기를 가진 친구네 집이 또래들의 아지트가 되어 매일 그 집에서 모였다. 마리오카트나 드래곤볼 같은 콘솔 게임을 하다가 컴퓨터로 멀티플레이 탱크 게임을 하다가 삼국지를 하다가 대전 격투 게임을 지칠 때까지 했다. 초등학교 때의 여가는 축구와 게임이 전부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는 방과후 특별활동으로 MS-DOS와 GW-BASIC 등의 프로그래밍을 배웠다. 94~95년도 인 것 같은데 당시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이용했다. MS가 뭔지도 DOS가 뭔지도 몰랐고 사실 프로그래밍을 제대로 배웠던 기억은 없고 선생님 몰래 고인돌 같은 게임을 했다. MS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였고 DOS를 앞세워 당시 OS 시장에서 IBM과 애플 등과 전쟁을 치르던 중이라는 것도 20년 가까이 지나서 알았다.
중학교 때는 오락실도 열심히 갔다. 철권과 킹오브파이터, 1942, 매탈슬러그를 했다. 가스렌지에 불꽃을 일으키는 장치를 오락실 기기 동전 넣는 곳에서 누르면 동전을 넣지 않아도 플레이할 수 있었는데 몰래 하다가 걸려서 혼난 적도 있다. 겁이 많아서 나쁜 짓은 별로 안 했던 것 같은데 게임은 너무 하고 싶어서 그랬나보다. 독서실 간다고 하고 오락실을 갔던 적도 많은데 한 번은 아버지에게 걸렸는데 크게 혼내지 않으셨던 게 기억이 난다.
컴보이라는 휴대용 게임기를 항상 휴대하고 다니면서 다 깬 게임을 또 하고 또 하고 했다. 재미있어서라기 보다는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는게 아닐 때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만화책 대여방, 비디오 대여방에서 만화책과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곤 했다. 당시에 3.5인치 디스크 5장~10장에 달하는 RPG게임이나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유행했고 인터넷 시대 이전에 PC통신의 시기가 있었는데 나는 당시 유행하던 커뮤니티나 채팅 보다는 게임이 재미있어서 PC통신은 자료실 정도만 이용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무렵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진 친구네 집을 매일 들러서 늦게까지 놀다가 귀가하곤 했다. 철권이나 파이널판타지7을 플레이했다.
중3 때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었고 PC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금과 같은 PC방 분위기가 아니라 사무실 같은 곳에 컴퓨터만 많이 갖다놓은 느낌이었는데 시간 당 2천 원인가 3천 원인가 중학생에게 비싼 가격이어서 느긋하게 게임하지 못하고 한 두 시간 바짝 하고 헤어지곤 했다. 난 중 2~3때 항상 의기소침해 있었고 학교에 가기 싫었고 부모님과는 말도 잘 안 했었는데 어머니는 그 때 속상했다고 하신다.
고1 때는 써클 활동으로 '전산반'에 가입했는데 3차에 걸친 면접과 10:1에 달하는 경쟁율이었다. 100명 정도가 지원을 해서 10명 정도를 뽑았다. 실력을 본다기 보다는 이 써클에 얼마나 들어오고 싶은지 열정을 보여야 가입을 할 수 있다는 게 전통이었는데 지금도 전산반 선후배 동기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그런 전략이 먹히긴 했던 것 같다. 그 전에는 축구나 게임 말고는 뭔가 열심히 했던 것이 없던 것 같은데 이 써클은 일단 가입부터 빡세고 선배들이 무서워서 열심히 활동을 하게 됐다.
방과후에 매일 남아서 축제나 체육대회 준비를 하거나 프로그래밍, 3D 모델링, 에니메이션 툴 등을 배웠고 선배들을 만나면 복도가 울리도록 크게 인사를 해야 했다. 나는 그게 싫지가 않았는데 어느 정도의 규율과, 축제라는 목표와, 프로그래밍/그래픽 툴 공부라는 성장과, 매일 모이고 크게 인사를 하면서 느끼는 소속감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반 친구들보다도 써클 친구들과 동고동락을 하게 되다보니 더 친하게 지냈다.
나는 MAX로 3D 에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아주 어설픈 실력이었겠지만 내가 혼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뿌듯했었다. 데스크탑 컴퓨터를 부품별로 사서 직접 조립했었고 친구네 집 컴퓨터가 고장났다고 하면 출장 수리를 해주고 짜장면을 얻어먹기도 했다. PC용 건반 게임인 비트매니아가 유행했고 오락실에서 펌프나 이지투디제이 같은 게임을 잘하는 친구가 멋있어 보였다. 2학년 방학 때는 학교 전산실을 쓸 수 있었는데 전산반 친구들과 거의 매일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친목을 다졌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부터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어서 원래 반에서 10~15등 하던 등수가 3학년 부터는 전교 2~3등까지 올랐다. 그 시기에 메가스터디의 인터넷 강의가 생겼는데 학원에 가지 않고 인터넷 강의를 2배속으로 들으면서 공부했고 나에게 잘 맞았다. 공부를 한참 하던 시기에 반에서 나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뭔가 이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았고 내가 선택한 방법은 한 번 주먹다짐으로 결판을 내는 것이었다.
중학교 때 자존감이 낮기도 하고 외소하고 겁도 많았던 시기에 나를 괴롭히던 친구들이 있었고 고등학교 와서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성적이 오르면서 자존감이 높아져 있었는데 이 히스토리를 알고 있고 아니꼽게 보던 친구가 비아냥 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고 한 동안 참고 피하다가 어느 날 내가 날을 잡아서 시비를 걸고 치고 받았다. 내가 겁이 많은 성격인 건 여전했고 싸움을 해봤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그 시기를 내 삶에서 용기를 내어 뭔가를 깬 최초의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자연스러운 상태라면 내가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일을 행하기로 선택을 했고, 그 결과 그 친구는 뒷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화가 나서 싸운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해결책을 실행했다. 부연하자면 내가 그 친구를 때려서 겁을 주거나 한 건 아니고 덩치가 나보다 컸기 때문에 내가 많이 맞았는데, 나에 대해 '건드리면 성가시다' 정도로만 인지시켜도 충분했다. 고2 담임선생님은 서울 안에 대학을 못 갈것이라고 했는데 내신과 수능이 엄청 올라서 연세대 공대에 02학번으로 입학했다.
자존감이 올라 있었기 때문에 대학교 1~2학년 때 굉장히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동아리 활동을 했고 수백권의 책을 읽었고 연애를 했고 여러 공모전에 도전해 수상도 했다. 대학 때는 공강 때마다 당구 대신 레인보우식스라는 FPS를 친구들과 자주 했고 클래식 기타 동아리 활동도 했다. 동아리 연주회나 여름 MT에 가고 조인트 동문회를 하고, 주량 모르고 선배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시다가 필름이 끊기는 등 성인이 되어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최초로 경험했다. 아직도 생각나는 당시의 경험들은 내가 그래도 풍성한 대학생활을 했구나 하고 안도하게 해준다.
2학년을 마치고(2004년) 아버지가 하시던 휴대폰 대리점에 도움이 필요하기도 하고 내가 어깨 수술을 받아 거동도 불편해서 휴학을 하고 대리점에 앉아 책을 많이 읽었다. 대리점 컴퓨터가 전산 업무 빼고는 할 수 없었고 손님이 뜸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엄청 빌려와서 하루 종일 읽었다. 줄을 칠 수 없으니 컴퓨터에 책 내용을 요약 타이핑하면서 읽었는데 그 때 내용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실력이 늘었던 것 같다.
복학하지 않고 그 해 겨울에 병역 특례 회사에 입사해서 22살에 처음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 계속 개발을 했고 외주 개발도 하고 스타트업들의 개발팀장이나 CTO를 맡으면서도 복학을 안 하다가 2010년에 복학해서 2012년에야 졸업했는데 항상 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은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일주일에 한 두 번 잠깐 씩 가서 발표를 하거나 프로젝트 제출을 해서 딱 졸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학점을 받았다.
집에서 학비 지원을 받기 어렵기도 했고 일을 하는데 졸업장이 얼마나 의미 있을까 싶어 복학을 안 할까도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장학금과 내가 번 돈으로 학비를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을 한다면 고졸 보다는 대졸이어야 허락을 받기 쉬울 거라는 생각에 졸업을 했다. 이제 회사 생활은 그만하고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2013년에 인썸니아 개인사업자를 냈다. 정부지원사업 제출 마감 전날인데 급하게 사업자를 내야 했고, 그 고민을 했던 시간이 새벽 4시였기 때문에 꽤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