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약을 지었다. 떨어진 체력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선택한 처방이다. 한약을 자주 먹진 않았는데, 도대체 체력 회복에 답이 나오질 않아 먹어보기로 한 것이다.
문진표 같은 걸 작성하고, 한의원 원장님과 상담했다.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이라고 한다. 일주일에 6번 마신다고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공식, 비공식적인 회식이 두어 번 있고,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으면, 저녁식사에 반주로 마시곤 했다.
스트레스와 음주, 휴식 부족으로 간이 지칠 만도 했을 터. 머리로는 술을 줄이고, 휴식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잘 안되는 것이다. 한약을 지으면서, 주 2회 마시라는 원장님의 권고를 잘 지키기로 했다. 비싼 돈 주고 지었으니, 효과를 보기 위해 그 정도는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약을 먹기 전엔 새벽에 잠이 잘 깼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몹시 힘들었다. 점심시간이면 낮잠을 잠시라도 자두어야 했다. 한약을 먹은 지 일주일쯤 됐다. 몰라보게 체력이 회복됐다. 잠도 잘 자고, 아침에도 개운하고, 낮잠을 자지 않아도 꽤 괜찮은 거다. 한약 때문일까? 술을 줄여서일까? 잠을 일찍 청하고 있어서일까? 아마도 이 3가지 효과가 복합적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한약 파우치에 이런 문구가 있다. "달이는 정성 못지않게 먹는 정성도 중요합니다" 한약을 먹는 동안은 꽤나 먹는 음식 같은 걸 조심하게 된다. 그렇게 하도록 가이드 하기도 한다. 한약의 효용은 어쩌면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이런 걸 '행동 장치'라고 한다. 행동 장치는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스스로 행동에 제약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행동 장치와 관련된 유명한 얘기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이야기가 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세이렌 섬을 지나가게 되었다. 반은 여자, 반은 새의 모습을 한 마녀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하는데, 그 섬에 다가간 배는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게 되고, 결국 모두 죽게 된다. 여신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러한 위험을 알려주고 그에게 한 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키르케의 충고를 따라서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으로부터 살아남는다. 그는 자신을 가죽끈으로 돛대에 묶게 하고, 배 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귀에 밀랍을 넣으라고 명령하여 유혹당하지 않도록 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배와 부하들을 유혹할 수 없게 해놓았기 때문에 죽음의 해안에 접근하지 않을 수 있었다.[1]
이 얘기는 자기 조절의 중요성에 대해 직관적으로 설명해준다. 오디세우스는 그가 할 수 있는 선택권들을 제한해둔 덕분에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손을 묶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자신의 몸을 묶도록 한 행동이 바로 '행동 장치'이다.
# 투자자들의 행동 장치 - '장기투자', '분산투자'
투자에 있어서도 ‘행동 장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부자들의 생각법>의 저자 하노 벡은 행동 장치를 활용하는 방법으로 연금상품을 이용해보라고 한다. 연금상품은 해지가 굉장히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집을 사라고 권한다. 집을 사는 것은 분산투자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짓일 수 있다. 일반인의 경우 집을 사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입해야 한다. 전 재산을 한 가지 대상(집)에 넣어 두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또한 집을 사게 되면 재산의 유동성이 낮아진다. 또 다른 투자처가 있어도 투자할 여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돈을 묶어둘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돈을 집에 묶어 두면 더 이상 그 돈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진다.[2]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은 돈만으로는 집을 살 수가 없다. 이럴 경우 대출을 이용하게 된다. 이때의 대출 역시 행동 장치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빚을 부담스럽고 무서워한다. 심리적인 영향 탓에 월급이 들어오면 빚을 먼저 갚고, 소비를 한다. 즉 소비를 줄여주는 효과를 하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방법으로 저축을 먼저 한 후 소비를 하라고 하지만, 이 방법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대출을 대할 때와 저축을 대할 때의 심리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적인 차이 때문에 행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개인투자자가 실패하지 않은 투자를 하기 위해서도 ‘행동 장치’는 아주 중요하다. 단기적인 변동성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하며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 또한 다양한 자산에 분산 투자한 무로서 특정 자산의 위험을 감소시켜야 진정한 장기투자가 가능해진다.
투자자에게 ‘장기투자’와 ‘분산투자’는 잃지 않는 투자를 위한 중요한 ‘행동 장치’인 것이다.
참고
[1] 테리 번햄, (번역 서은숙),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 (갤리온, 2008년), p.333
[2] 하노 벡, (번역 배명자), 『부자들의 생각법』, (갤리온, 2013년), pp.298-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