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자칫 사치스럽다. 지금 당장 눈 앞에 팔아야 할 제품 혹은 서비스가 있는데 한가하게 브랜딩이나 하고 앉았나 라는 자괴감이 들 수 있다. 대기업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몇 년간 하며 브랜딩의 중요성에는 공감했지만 때로는 그 허세와 말장난에 쓴웃음이 나왔다. 100 페이지 가까운 브랜드 전략 문서를 읽다 보면, 이게 내가 아는 우리 회사 맞나?라는 생각이 들며 공감하기 어려웠다. ‘문서를 위한 문서’의 본보기 같은 문서였다.
세상에서 젤 싫은 '문서를 위한 문서'
그래서인지 이제 갓 시작한 스타트업 ‘삼분의 일'에서 브랜딩을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거 정말 해야 할까? 왜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반복할수록, 대기업에서 하던 낡은 관습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브랜딩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었다.
브랜딩으로 시간을 많이 끌고 싶지는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브랜딩을 해야 하는 목적을 규정하는 일이었다. 딱 이 세 가지를 위해서만 브랜드를 정의했고 그 이상 쓸데없는 수고는 들이지 않기로 했다.
정체성 찾기 :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야 한다.
남들에게 각인시키기 : 우리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최대한 선명한 모습으로 알려야 한다. 이 무한경쟁 시장에서는 정체성이 분명한 브랜드만 사람들은 기억한다.
직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일하기 : 직원 모두가 브랜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익히고, 일관성을 가지고 지켜야 한다. 브랜드를 내재화해야 흔들림 없는 선명한 브랜드를 유지할 수 있다.
브랜딩의 카테고리는 너무나 많고 사람들마다, 기업마다 정의가 다 다르다. 초반에 용어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으나 (예: 그건 비전이 아니라 미션이다.) 여기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학술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었기에, 위 언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끼리 끄덕끄덕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면 됐다.
정리할 카테고리를 6가지로 나누었다.
1. 핵심가치: 우리를 나타내는 핵심 키워드
2. 비전: 궁극적인 목표
3. 미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수행할 과제
4. 타겟: 가장 집중하여 생각할 사용자층
5. 페르소나: 브랜드 의인화
6. 브랜드 아이덴티티: 사람들이 직접 경험할 브랜드의 표면과 시각화된 모습
브랜드 정의를 할 때 핵심가치부터 시작했다. 브랜드 담당자로서 이것저것 정의하기에 앞서 다른 직원들이 생각하는 '삼분의 일'의 인상을 알고 싶었다. 이를 어느 정도 합의를 한 후 구체적으로 살을 붙여나가고 싶었다. 삼분의 일에서는 커뮤니케이션 툴 중 하나로 ‘MeisterTask’를 쓰고 있는데 거기에 댓글로 ‘삼분의 일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공모받았다. 총 35개 형용사 후보가 나왔다.
투명한, 저렴한, 합리적인, 꾸미지 않은, 멋 부리지 않은, 편한, 캐주얼한, 기존에 없던, 남다른, 담백한, 미니멀, 심플, 꼭 필요한 것만 있는, 전문적인, 스마트, 똑똑한, 분석적인, 효율적인, 나에게 꼭 맞는, 친절한, 완벽한, 거품을 뺀, 실속 있는, 유능한, 믿을 수 있는, 명쾌한, 필요한, 실용적인, 새로운, 흥미로운, 몰랐지만 뒤늦게나마 알게 된, 가치 있는, 신뢰 가는, 재미있는, 호감 가는
이 형용사들을 펼쳐놓고 모두 모여서 이 중에 각자 5개씩만 골라달라고 했다. 각자 골랐다. 그런 다음, 2개씩 버리라고 했다. 5개를 고르기는 쉬웠는데 3개로 추리는 건 다들 어려워했다. 3개씩 고른 후 모두 펼쳐놓고 각자 고른 걸 비교했고 고른 이유를 돌아가며 설명했다. 재미있는 건 모두가 ‘합리적인’을 골랐다는 점이었고, 나머지는 겹쳐지는 부분이 있거나 유사한 내용이었다. 격렬한 토론 끝에 핵심 키워드를 3개로 정리했다.
합리적인 : 이유가 타당하고 납득이 간다. 꼼꼼하게 따져보고, 꼭 필요한 것만 간결하게 제시한다.
전문적인 : 우리가 가장 잘 알고 능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속 연구하고 분석한다.
섬세한 : 사용자에게 관심이 많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친절하게 다가간다.
핵심가치를 정의한 후 나머지는 의외로 정하기 쉬웠다. 기존에 막연하게 맴돌던 이야기들을 다듬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의 비전은 처음 이 사업을 논의했던 단계부터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이 비즈니스를 왜 하고 싶고 해야 하는지, 꿈이 무엇인지 전주훈 대표가 내게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주었고 그 꼬임에 넘어가 삼분의 일에 합류하게 되어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했던 말들은 이렇게 정리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수면을 누려야 한다."
시작은 폼 매트리스라는 단일 상품의 판매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수면이라는 영역을 지배(!)하여 수면 전문 브랜드로 확장하고 싶다. 사람들이 하루의 2/3를 생산적으로 보내기 위해 하루의 1/3은 '완벽한 수면'을 경험해야 한다.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위한 프리미엄 브랜드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대중적이고 편한 브랜드이고 싶다.
비전을 이루기 위해 3가지 미션을 세웠다. 미션은 앞서 정의했던 핵심 가치와 호응하도록 정리했다.
완벽한 수면 : 수면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하여 완벽한 수면을 제공한다. 우리가 이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가 된다.
합리적인 구매 : 온라인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고, 배송과 설치가 간편하고, 거품을 뺀 합리적인 가격으로 승부한다.
평생 케어 : 팔면 끝이 아니다. 관계의 시작이다. 수면 경험 전반을 책임진다.
배달의 민족 브랜딩을 다룬 책 ‘배민다움’을 읽었는데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모두가 좋아할 브랜드를 만들려고 하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일부층에서 찐한 사랑을 받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 배달의 민족은 메인 타겟을 ‘회사 막내’로 좁게 잡아서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B급 정서로 승부했다. 이 전략은 통했고 소수의 팬층을 만들었다. 그 코드를 좋아하는 인접 소비자층까지 퍼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되었다.
우리도 메인 타겟은 최대한 좁게 잡았다. ‘30대 직장인 남성’ 같은 모호한 개념보다는 라이프스타일과 철학을 반영할 수 있게 잡고 싶었다.
그래서 설정한 타겟은 ‘자부심을 가진 개발자.’
공대 나오고 IT 업계에서 개발자로 일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 빅뱅이론, 실리콘밸리, IT 크라우드 등의 미드/영드에서 나올법한 괴짜(geek)이며, 개발자 농담을 좋아한다. IT 전반에 관심이 많고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가 나오면 한 번씩 써본다. 쇼핑은 주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쇼핑은 귀찮다. 허세 떠는 명품 브랜드보다는 합리적이고 가성비 높은 브랜드가 좋다. 이를테면 샤오미. 과도한 업무로 피로가 쌓여있고, 건강을 염려하지만 딱히 운동을 하진 않는다.
넘나 재밌게 본 미드 '실리콘 밸리'
메인 타겟의 사람들이 좋아할 사람을 떠올리며 브랜드를 의인화한 페르소나를 잡았다. 타겟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정했다.
'뭘 좀 아는 형’
공대 등 남자가 많은 집단에 한 명쯤 있는 뭘 좀 아는 형. 잡스보다는 워즈니악 타입. 모르는 건 이 형한테 물어보면 된다. 따르는 후배들이 많고 이 형이 얘기하면 왠지 믿음이 가고 귀 기울이게 된다.
앞에서 정의한 내용이 브랜드의 상위 개념이라면, 브랜드 아이덴티티부터는 사용자가 직접 보는 표면에 해당한다. 사용자와의 접점이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브랜드의 외관이다.
네이밍: '삼분의 일'
하루의 ‘삼분의 일’은 잠을 자는 시간이다. 인생의 2/3를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 ‘삼분의 일’ 수면 시간은 완벽해야 한다. 사용자는 일상에 집중하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우리에게 믿고 맡기면 된다.
우리의 비전을 담아 네이밍을 만들었다.
슬로건: ‘하루의 삼분의 일, 완벽한 수면의 시간'
우리의 비전을 한 문장으로 커뮤니케이션할 슬로건을 만들었다. 네이밍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피드백을 받고 이를 일부 해소하려고 했다.
톤(말투)
'뭘 좀 아는 형'의 말투를 상상하며 톤을 '진지한, 담백한, 캐주얼한'으로 잡았다. 정색하며 진지 빨고 쓴다. 농담을 해도 진지하게. 단호하고 확신에 찬 말 투로 신뢰를 준다. 담백하게 쓴다. 할 말만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한다.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한다. 캐주얼하게 쓴다. 극존칭보다는 편하고 자연스러운 말투를 쓴다.
고객센터 응대부터 소셜 채널에서의 포스팅, 마케팅, 그리고 웹사이트 팝업 하나까지도 일관된 톤으로 커뮤니케이션한다. 이건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자세하게 글을 따로 써볼까 한다.
브랜드 디자인
우리의 브랜딩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건 다음 글로 따로 작성하려고 한다. (2부를 기대해주세요. 뜨든.)
1. 핵심가치: 합리적인, 전문적인, 섬세한
2. 비전: 더 많은 사람들이 완벽한 수면을 누려야 한다.
3. 미션: 완벽한 수면, 합리적인 구매, 평생 케어
4. 타겟: 자부심을 가진 개발자
5. 페르소나: 뭘 좀 아는 형
6. 브랜드 아이덴티티
- 네이밍: 삼분의 일
- 슬로건: 하루의 삼분의 일, 완벽한 수면의 시간
- 톤: 진지한, 담백한, 캐주얼한
- 브랜드 디자인: (다음 글)
브랜드 정의가 브랜딩의 완성이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 직원 모두의 관심과 노력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브랜드를 성장시키는 건 ‘일관성’이다. 직원 한 명 한 명이 한 목소리를 내며 ‘내가 곧 삼분의 일 브랜드’라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마케팅, 사용자 경험, 콘텐츠, 제품에서 일관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면 조직문화, 일하는 방식 그리고 채용까지도 브랜드의 날카로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에버노트로 위 내용을 정리해서 직원들에게 간단하게 공유했다. 대단한 문서를 만든 건 아니었지만 브랜드 정의를 한 후 직원들끼리 커뮤니케이션하거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게 한결 수월해졌다. A/B 선택지가 있을 때, 우리끼리 묻는다. 이게 합리적인지, 전문적인 선택인지, 섬세한 접근인지. ‘자부심을 가진 개발자’가 과연 이걸 좋아할지, ‘뭘 좀 아는 형’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할지. 그렇게 묻다 보면 고민했던 문제의 답이 의외로 명쾌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브랜딩 과정이 정석은 아니지만, 빠르게 훅 정리하고 필요한 것만 간추리고 직원들과 소통 하기에는 ‘합리적’이었다. 브랜딩을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례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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