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뿐만 아닙니다.
마케터는 새로운 이벤트고민,
콘텐츠제작자는 뭘 만들어야 잘만들었다고 소문이 날지,
기획자는 무슨 프로그램 짜야하나..
강사들은 어떤 커리큘럼 만들어야 애들이 잘 알아들을까..
등등. 뭔가 나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 요정님을 간절하게 기다리게 됩니다. 크리에이티브함이란 것이 참 멋지고 찰진 단어이지만 그 현실은 그렇게 또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크리에이티브의 뜻이 '창조적인' 이란 의미라서 흔히들 '창조' 에 포커스를 맞추곤 합니다. 뭔갈 뿅! 하고 만들어내는 그런 의미로 말이죠. 크리에이티브는 뿅!이 아닙니다.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널브러진 수많은 단서들에게서 힌트를 찾고 조합하고 변형시키는 것에 가깝죠.
영화에서처럼 관자놀이에 번개가 내려치면서 눈이 휘동그래지는 그런 장면도 연출되지 않아요.
크리에이티브함은 오히려 변덕과 괴팍하고 지랄맞은 성격의 산물과도 가깝습니다. 자꾸 사물을 고깝게 바라보고, 삐딱하고, 질문을 던지고, 주워들은게 많고, 본 게 많은데다가, 자기주장도 있고, 취향도 확고해야 하죠. 우리가 인식하는 어떤 것이든 내 필터를 스윽 통과하면서 일종의 변형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차이를 발견하고 정돈하는 능력이 크리에이티브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녀석은 얼핏 매우 감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단어지만, 사실 상당히 논리적이에요. 자료를 찾고, 모으고, 수집한 후, 변형하고, 정돈하여 드러내는 과정이니까요. 이 모든 행동에 맥락이 없으면 그냥 그건 공상이 되버리고 맙니다.
당연히 이러한 활동은 두뇌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두뇌는 꽤나 게으른 녀석이예요. 주인의 명령을 잘 듣지도 않죠. 그저어어...편한 것만 찾고 하던 것만 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토록 마구니가 가득 차있는 머릿속에 강렬한 법봉의 짜릿함이 전달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게 바로 요정님이 오신거예요. 요정님이 오시면 일단 다양한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강력한 집중력과 기발함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물론 그 시간은 굉장히 제한적이고 조건이 까다롭긴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요정님의 특성과 생존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정님은 15분의 예열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단 책상에 앉으면 유튜브부터 켜지말고 대지 만든 뒤에 15분간 이래저래 안내선이라도 만들어놓도록 합시다. 15분간 그러고 있으면 어느새 스멀스멀 이런 저런 구성과 배치가 떠오르게 된답니다. 운동하기전엔 스트레칭을 쭉쭉해야 해요. 뚜둑뚜둑 소리도 내고 오백년간 잠들어있던 육신의 먼지를 조심스레 벗겨내듯 근육들을 이완시켜줘야 사고가 안나잖아요. 두뇌도 신체기관인 만큼 비슷한 과정을 거칩니다. 당을 끌어올려 부스트업도 시켜야 하고 전기신호의 파장도 바뀌기 시작합니다. 혈류량을 늘리고 호르몬에도 변화가 찾아오죠. 몸이 학습이나 업무에 적합한 모드로 변할 수 있는 최소시간!!~~이 필요하단 거에요. 처음부터 '앞으로 20시간동안 쉬지 않고 일을 해보자!' 라는 굳은 의지를 다지면 의지처럼 그냥 몸이 굳어버립니다. 부담없이 딱 15분만 하고 끝내자~라는 마인드여야... 시작도 수월하게 할 수 있죠. 그리고 막상 15분이 지나면 내려오기 좀 찜찜할 정도로 살짝..집중이 되어있는 상태가 되어있을 거예요. :)
2. 뭔갈 먹읍시다. 다만 일하는 도중엔 먹지 마세요. 요정님은 빌리엔젤 케익과 초코퐁당같은걸 굉장히 좋아하시긴 하지만... 그건 팝콘같은거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예고편 나올 때 다 먹는거죠. 본 작업이 시작되면 잘해야 커피나 쪽쪽거리던가 아니면 껌 정도가 딱 좋습니다. 사실 당을 우걱우걱 섭취하는 게 학습에 있어서 딱히 좋은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혈당변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면 피로감이 우르르 찾아오죠. 시험전에 마시는 마법의 포션(레드불과 스누피커피우유 등등....괴랄한 혼합음료까지..)은 오늘의 나를 불태워 내일은 소멸에 이르게 만드는 거대한 흑마법과 같아요. 그러니 과다한 당충전은 내일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다만, 턱을 오물오물 씹어주는 건 두뇌를 자극시켜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으니 오독오독 거리는 무언가를 먹어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시작하면 왠만하면 책상에서 먹을 건 치우는 게 좋더라구요. 사람은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동물인데, 내 주변환경의 역할에 대해 의미부여를 하길 좋아합니다.
침대는 자는 곳
책상은 일하는 곳
화장실은 쉬하는 곳.
등등...각각의 장소에 정해진 행동들이 습관으로 굳어져있죠. 그런데 자꾸 책상에서 뭔가 쭈서먹으면서 일하게 되면......머지 않아 앞으로도 책상에만 앉으면 배가 고파지는 파블로프 강아지 효과를 체험하실 지도 몰라요. 더불어 일하면서 이것저것 쭈서먹으면 온 키보드에 마우스에 태블릿에 기름이나 묻히고 일은 일대로 안되더라구요. (물론 개인차는 있습니다.)
3. 요정님은 성격이 급합니다. 빨리빨리!!! 어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딱딱 목업이 다운받아져야 합니다. 포토샵도 챡챡 켜져야하고 외장하드도 버벅대선 안됩니다. 뭔가 막히는 것들. 그러니까 와이파이가 안된달지, 컴터가 갑자기 업데이트를 해버린다던지...아니면 컴터가 꼬져서 파일 저장하는데 한나절 걸린다던지..이러면 요정님은 금새 떠나버리십니다. 사람의 집중력은 생각보다 쉽게 흩어지는데.. 집중력을 유도하는 것은 무언가 움직이는 사물/이미지의 존재입니다. 안구는 끊임없이 진동하며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딩바만 뚫어져라 보고있으면 눈이 엄청나게 피곤해져요. 자고싶죠. 또한 멈춰있는 사물말고 자꾸 다른 곳을 보려고 하는 안구운동효과 때문에 옆에 있는 광고에 자꾸 눈이 가게 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처리속도를 줄이는 좋은 장비를 사도록 합시다. 돈 벌어서 다 장비에 쏟는 게 디자이너의 인생이죠.
4. 노란색을 좋아합니다. 요정님은 노란조명을 좋아합니다. 노란색 파장은 눈을 편하게 해줍니다. 게다가 파장이 길어서 심신의 안정감을 주기도 하죠. 거기에 간접조명이라면 한결 공간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묘한 갬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노란색 조명을 쓰되, 스탠드불빛은 천장에 쏘도록 합시다.
5. 살짝 졸릴 때.. 눈이 막 감겨버리는 그런 상태말고. 약간 멍때리게 되는 그런 상태가 종종 있어요. 영혼먼저 이불속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죠. 사실 이렇게 비몽사몽할 때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구석에 쳐박혀있던 기억이나 미쳐 정리하지 못한 수많은 정보들이 뒤죽박죽 섞이게 됩니다. 크리에이티브함은 최대한 많은 단서들을 충돌시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게 중요한데, 이렇게 넋이 나간 새벽3시 정도엔 자연스러운 스파크를 잘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효과때문에 살짝 잠결에 공부하는 게 다음날 기억에 더 오래 남는 다는 연구결과도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하죠. 이덕분에 꽤나 기발하고 신박한 레이아웃을 구상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15분만 지나면 졸려서 더 이상 일을 못한다는 게 단점이죠.
6. 끊임없는 정보쌓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새벽3시에 일을 하지 않는 경우. 벌건 대낮에 그 분을 소환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론 서점, 사람구경, 핀터레스트 구경하기, 매거진 보기, 딴짓하기, 창밖보기, 쇼핑하기 등등이 있습니다. 사실 일 말고 대부분의 딴짓은 모두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컴터켜고 모니터를 보고 하는 게 아니더라구요. 뭔가 시안요청을 받으면 일단 서점에 가서 요리책이든 여행책이든 잡다한 정보들을 우르르 집어넣고 섞는 작업부터 합니다. 쌩판 하얀 백지에서 뭔가를 만들려고 하면 미칩니다. 흰 종이엔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인풋이 없으면 아웃풋도 나오기가 힘들죠. 인간의 기억체계는 연상하고 꼬리잡기를 좋아해서 뭔가 단서를 넣어줘야 해요. 그래서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관계된 이미지나 기억을 유도하기도 하느 거거든요. '단서를 주세요.' 상상력으론 확실히 힘든 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본 게 많았더라도 당장 생각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거든요. 일 해야 하잖아요. 그러니 잠재된 고대의 기억을 다시 리마인드 시켜주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딴짓을 (몰래) 권장하는 바입니다.
7. 부정적인 감정은 요정님이 좋아하는 굉장한 에너지원입니다. 빡침, 열등감, 인정욕구, 승부욕, 자괴감 등등은 아주 훌륭한 자원이죠. '저 놈에게 이기기 위해서!' '팀장님께 잘보이려구!' '난 멍청한 해삼자식이야!' 등등의 마인드는 얼핏 되게 나빠보이지만, 또 막상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사실 저런 마음 안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어차피 승부욕이나 인정욕구, 열등감은 평생친구입니다. 기왕 데리고 살거면 잘 활용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들끓는 감정들은 지속적인 불안감을 유도하게 되는데, 사람이 뭔가 행동을 하는 이유는 대다수가 '불안해서' 입니다. 불안함은 현재의 드러누움보다 뭔갈 만들어야해! 배워야해! 새로운 걸 해야해! 라고 나를 부추깁니다. 친절하진 않지만, 거칠고 행동력 좋은 친구죠. 게다가 이러한 감정들은 에너지가 굉장히 커서 가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실력의 한계나 그냥 생각의 한계, 또는 이성의 끈으로 잡고있던 굴레를 끊어버릴 수 있게 만들어주죠. 요정님 눈이 붉게 빛나며 광전사로 변하는 순간입니다.(주로 빡치거나 조급할 때 등장합니다.) 각성모드가 되신 요정님은 화장실도 참게 만들더라구요.
덧붙이자면 크리에이티브 요정님은 수줍습니다. 주로 혼자있을 때 얼굴을 내밀죠. 등 뒤에 팀장님이 있으면 안나와요. 있던 요정도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아직 미완인 어떤 것에 대해 평가받는 것은...여러 심리학적인 이유를 들지 않더라도 그냥 신경쓰이고 짜증나는 일이거든요.
디자이너들 책상에 표지판이라도 놔드려야 할까봐요. '요정님 강림중' 이런거...
https://www.facebook.com/readingjiaxi/videos/2016388665072946/
헤헤..이번에 제 책이 책읽찌라 페이지에 소개되었어요 :) 히히.... 함일거바! 이거 엔딩멘트 넘나 좋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