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퇴사 후 2년이 지났다.
입사 후 5년보다 퇴사 후 1년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퇴사 후 1년보다, 그 이후의 1년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작년 이맘때 퇴사 후 1년 이라는 글을 썼다.
퇴사 후 1년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우왕좌왕 더듬던 시간이라면,
퇴사 후 2년은 이제 바닥을 찍고 다시 일어서는 근육을 기르는 시간이었다.
퇴사 후 1년까지는,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었다.
퇴사 후 2년이 되자, '회사 밖은 지옥이 아니라 그냥 또 다른 전쟁터'일 뿐이었다.
다만 회사 안의 전쟁터에서는 내가 병졸로서 총알받이 역할을 했다면, 회사 밖 전쟁터에서는 그래도 일군의 장수가 되어 게릴라 전이라도 진두지휘하는 역량을 기르고 있다.
퇴사 후 1년까지는 동물원의 호랑이에서 야생의 고양이로 작아졌다면, 퇴사 후 2년이 되자 그래도 살쾡이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1년 전의 나는 아직은 풋풋하고 조금은 어설프며 약간의 허세도 있었다.
그러나 퇴사 후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조금 더 조급해지고, 더 저속해졌으며, 더 정직하게 인생을 바라보게 되었다.
출처 : 단행본 <퇴사학교>, 오미선 디자이너
2.
퇴사 후 2년, 나는 더 조급해졌다.
달성할 목표, 추구할 가치, 신경쓰일 사람들, 챙길 것들이 더 늘었다.
<퇴사학교>를 창업하면서 1년차 초보 창업가로서 온종일 사업, 가치, 팀 그런 것들에만 관심을 갖는다.
'사업이 곧 나이자, 내가 곧 사업'인 인생이 되었다.
매출이 오르면 하루가 즐겁고
매출이 떨어지면 하루가 우울하다.
난 그렇게 일희일비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하루하루를 충실히 온전히 다 살아간다.
일희일비한다는건 내 시간의 기준이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아니라 하루, 시간, 분 단위라는 사실.
그만큼 숨가쁘게 매순간을 던져 울고 웃고 느끼고 살며 나를 만끽한다.
한껏 흐트러지게 피어나다 후두두둑 지고 마는 봄 꽃들처럼.
꽃은 조급하다.
봄은 조급하다.
언제 피고 언제 사라질지 조마조마하다.
한 순간 만끽하다 이내 사라진다.
내 인생이 그와 같음을 느낀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게 되었다.
멍 때리고 유유자적하는 여유는 잃어버린 지 오래다.
휴식 시간조차 철저히 계획되고 관리되어야 할 정도로
인생이 빠듯해졌다.
아끼고 관리하며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집중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여전히 조급하다.
일희일비 : 매출이 오르면 하루가 즐겁고 매출이 떨어지면 하루가 우울하다 (아큐브 토크콘서트 중)
3.
퇴사 후 2년, 나는 더 저속해졌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과거엔 먼 미래가 중요했다.
늘 먼 훗날의 좋은 일, 나중에 가치 있고 의미있는 일, 사회에 기여하는 선한 영향력, 미래의 비전과 언젠가 자아의 실현 등의 형용사와 같은 것들이 중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존이다. 오로지 현재다.
미래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생존 없이는 무의미하단 걸 깨달았다.
형용사보단 동사가 더 중요하다.
살아야 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
굶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오직 생존만을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지금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전쟁터이다.
매일 긴장하고 매일 경계한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음에, 이번 한 달도 무사히 생존했음에 감사하다.
그러나 내일은, 다음 달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안심할 순 없다.
동물원에는 두 종류의 동물이 있다고 한다.
사람에게 다가오는 류.
사람이 다가오는 류.
전자는 먹이를 찾아 사람의 손 위로 날아오는 새다.
늘 긴장하며 먹이를 탐색하고 저 사람들이 나를 해치지 않을까 경계하면서도 다가가야 한다.
후자는 통 안에서 뒹굴거리는 햄스터다.
하루 세 끼 정해진 시간에 따박따박 먹이가 나온다. 사람들은 귀엽다고 쓰다듬고 좋아한다.
햄스터는 편안하다. 더 안락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금방 죽는다고 한다.
새는 불편하다. 더 긴장되고 불안하다.
그러나 더 건강하다. 더 오래 살고 자유롭게 활공을 한다.
본인 손으로 직접 먹을 것을 찾는 근육은 매일 새롭고 강하게 단련이 된다.
출처 : 혼자를 기르는 법, 김정연
4.
퇴사 후 2년, 나는 더 정직해졌다.
한 만큼
쓴 만큼
군더더기 없이.
필요없는 건 하지 않고
쓸데없는 건 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것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
내게 주어진 자원과 시간에 집중하여
최대한 군더더기 없는 레이저처럼 조탁해야 한다.
그럴려면 정직해져야 한다.
나는 내가 투입하는 시간만큼만 성장한다.
내가 가치를 느끼는 곳,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곳에 시간을 써야 한다.
시간을 투입할수록 내가 더 성장하고
누적될수록 가치가 더 커지는 일에 시간을 써야 한다.
퇴사 후 인생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시간이 아니라 성장에 가속도가 붙는다.
입사 후 5년보다 퇴사 후 1년 더 많은 일들이 있고,
퇴사 후 1년보다, 그 이후의 1년 더 많은 일들이 있다.
하루 하루를 허투루 쓰지 않고 매 순간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나는 더 배우고 더 성장하고 있다.
시간은 오히려 더 느리게 간다. 아니, 되려 더 충만하고 더 세세하게 내게 다가온다.
체감이 다르다.
대기업 시절에는 일주일 한달 일년이 똑같았다. 회사 생활 초반에는 성장의 가속도가 빨리 붙는가 싶더니 몇 년차가 지나면서 점점 기울기가 시들어졌다. 어느새 매번 똑같은 출퇴근을 반복하는 나를 보며 지극히 안정적인 평소의 회사 생활을 기반으로, 오히려 회사가 아닌 것들 (이직, MBA, 자기계발, 모임, 취미, 여가 등) 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내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갔다.
퇴사 후에는 하루 하루가 새로웠다. 안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무에게도 정해진 바는 없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불가하고, 모든 것이 중요하고 또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대기업에서는 정해진 레고 조각들로 더 큰 성을 짓는 것이었다면, 퇴사 후에는 작은 찰흙들로 뭐든지 만들 수 있었다. 비록 아직은 작고 초라하지만.
전략기획, 글쓰기, 독서 등 이십대 내내 쌓아왔던 것들이
삼십대가 되자 하나 둘 성과로 발현되는 것을 느낀다.
회사 안에서는 회사의 틀에 맞추며 내 자신을 꾹꾹 누르던 것들이
퇴사 후 나다운 나를 찾는 과정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친다.
내게 맞는 옷을 찾아 입으려는 여정은 고난도 많았지만 생각보다 더욱 즐거운 것이었다.
(누구 말에 따라 100배 힘들지만, 1,000배 재밌는 것)
내가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일치시켜 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
내가 가치를 느끼는 것을 하면서 동시에 나의 실력이 쌓여간다는 사실,
앞으로 내가 가는 길에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쏟을수록
그것이 나에게 더 큰 선순환으로 돌아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존의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조직문화가 얼마나 경색되어 있는지 생각한다.
가장 정직한 시간
나 혼자만의 시간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되는 것은 되는 것임을 안다.
내가 누구인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비교하지 않으려 한다.
그냥 나다운 것을 찾기 위한 실험.
나를 늘려가려 하고,
내가 아닌 것은 최대한 줄이려 한다.
그러나
EQ를 많이 잃었다.
관리와 지시에 익숙해지고,
사람이 ROI로 계산되기 시작한다.
잘난 척이 늘었고
좌절과 실망, 분노와 짜증도 늘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그 자리는 내가 만든다.
퇴사 후 2년,
나는 더 조급하고 더 저속해졌다.
여전히 생존에 허덕이고
기쁜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다.
그러나 조금은 더 생에 정직해지고
어제보다 내일 더 성장함을 믿는다.
앞으로 1년 뒤
나는 어떤 자리를 만들게 될까?
그래도 힘든 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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